3인의 교수전: 한정식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

2006.10.11. 수 ~ 2006.11.08. 수

<작가의 글>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

한 정식

 

내가 절을 찾는 것은 절이 좋아서이다.

절이 좋은 것은 그 고요로 해서이다. 요즈음 절은 철도 없는 관광객으로 시끄럽기는 해도 그것은 잠시, 그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나면 다시 이명이 째앵 하는 고요로 깊이 잠긴다. 산 속에 자리 한 그 마음이 우선 고요하다. 산에서는 물도, 풀도, 돌도, 모두 고요하다. 사람조차도 산에 들고 절에 안기면 고요해진다.

고요는 요즈음 내가 사진으로 이루고자 하는 나의 세계이다.

고요를 찾아 그 고요 속에 내 사진을 담그고자 해서가 아니다. 고요, 곧 적정 적멸의 경지가 내가 이르고자 하는 내 사진의 궁극이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진으로 이룰 수 있는 선(禪)의 경지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사진적 추상의 한 완성형이다. 이러한 선의 세계는 추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를 수 없다.

그 길은 사진이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지평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추상을 이루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허무한 짓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진의 추상화가 사진이 이루어야 할 이상 역시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피해야 할 금기는 더더욱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영역의 확장은 늘 있어왔는데, 그만한 필연성이 거기 있어서였다. 그 길의 하나를 확실히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어선 길이 이 길이다. 내가 그를 이루겠다는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내가 택한 나의 길, 가는 데까지 가고자 한다.

사진의 추상화는 사물 벗어나기를 통해 이룰 수 있다.

구체적 사물 없이는 찍히지 않는 사진이 어떻게 사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물을 찍되, 사물이 느껴지지 않고, 작가가 먼저 보이는 사진,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 사진이 이루어질 때 사진은 사물을 벗어난 것이 된다. 사물이 제1의적 의미에서 벗어나 제2, 제3의 의미를 창출할 때, 의미도 형상도 벗어난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때 사진적 추상은 이루어진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 형상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 너는 곧 부처님을 뵌 것이 되느니라.” 깨달음 자체가 곧 부처임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사진이 그렇다. 눈앞의 사물이 사물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사진은 찍힌다. 형상을 가진 모든 사물이 허상임을 깨닫는 자리가 사진이 출발하는 자리이다. 사물은 생각과 느낌의 출발점이다.

사물을 벗어남으로써 사진의 추상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금강경에서 이미 가르쳐 주신 바를 따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말씀 속에는 사진의 길도 이미 들어 있었다.

내가 절을 찾는 것은 절이 좋아서이다.

절이 좋은 것은 일상이 증발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이다. 일상이 증발한 곳에서는 모든 사물이 추상화된다. 절에서는 우리의 삶도 말갛게 바랜다. 내 발이 디디고 선 땅조차도 백지장처럼 무게를 잃는다. 무중력의 우주적 공간이 거기 펼쳐진다.

“이와 같이 들었노라”는 모든 경전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고 이들 사진 몇 장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않았다. 내가 부처님의 뜰 안을 거닐며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옮겼기에 이를 밝혀 붙인 이름일 뿐이다.

(2006. 7.)


Venue

뮤지엄한미 방이

참여작가

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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