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사진미술관은 4월 8일부터 6월 5일까지 MoPS 한미사진미술관 삼청별관에서 박형근(1973~ )의 개인전 《중중무진重重無盡》을 개최한다. 가시적인 세계 너머의 이면을 직관적
인 연출과 화면 구성을 통해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한 박형근의 대표 연작《Tenseless》의 신작(2020~2022)을 2015년 이후 7년만에 소개하는 자리다.
최근 인류에게 닥친 기후 위기와 팬데믹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간과해왔던 미시적인 존재를 드러나게 하였고, 이를 촉발하게 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전시 제목 ‘중중무진’은 화엄교학에서 일컫는 법계연기로 우주의 모든 사물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는 세계관을 뜻한다. 전 세계가 동시에 겪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중중무진’의 인과율 안에서 유기적인 관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간 천착해오던 내적 탐색과 감각적 사유의 시선을 외부로 확장시켜 ‘중중무진’이라는 키워드를 매개체 삼아 작가가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는 세계관과 태도에 관한 견해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대표 출품작인 〈Tenseless-101, Jungjungmujin〉은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존 마틴John Martin의 종말론적 회화와 화엄교학의 법계연기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번 개인전의 제목과 동명의 작품이다. 우주 만유 속 물질과 비물질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뒤섞여 있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상상하며 만든 사진으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동굴과 그 사이로 보이는 짙은 밤하늘에 수놓인 혜성들은 태곳적 세상을 연상시킨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을 재구성하여 영원한 우주의 이미지가 도출된 것과 같이 찰나의 순간 없이는 영원도 존재할 수없다는 무상의 가르침을 일깨운다.
구름이 펼쳐진 하늘을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Tenseless-103, Reflection〉은 실은 물에 비친하늘과 구름 사진이다. 이 곳에서 하늘과 땅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경계는 소멸된다. 사방에 배치된 나무는 해안가에서 자라는 곰솔나무이다. 구불구불한 몸통은 500여 년이 넘는 난고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낸 실존적 증거이자 세속의 삶과 역사를 상징한다. 사방에 배치한 곰솔나무는 4괘를 연상시키는데 우리 전통 회화에서 4괘가의미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세계관에 대한 염원이 담겨있다.
항공사진을 연상시키는 〈Tenseless-102, Last land〉는 겨울 강을 촬영한 파노라마 이미지이다. 한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새파란 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물은 계절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면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 짙은 청색의 수면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조선 민화〈어락도〉에서 영감을 받은 이 사진 속 물고기들은 미시적인 존재를 표상하며 끊임없이 생동하는 에너지를 상징한다.
한미사진미술관은 박형근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망하기 위해 20여 년 넘게 지속해온 《Tenseless》연작을 한 권의 사진집으로 묶은 『Tenseless』를 출간한다.『Tenseless』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연작을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수록하고, 연작 전반을 개괄하는 김선영 학예연구사의 기획노트를 함께 실었다. 그간 작가의 작업이 감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