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조제 건설 이후 작가가 만난 남양만은 바다의 개펄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고갈되고, 죽어 가는 사막이었다. 갯벌에서 서식하던 굴조개, 맛조개, 바지락 등은 방조제를 따라 하얀 조개 무덤의 띠를 이뤘고, 바닷물을 머금은 개흙은 소금에 절은 사석과 모래땅으로 굳어버렸다. 그 위에 피부병처럼 붉게 피어오른 염생(鹽生) 식물들은 띄엄띄엄 혹은 무리를 지어 번져나갔다.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오가며 만든 생명의 흔적들은 사라졌다. 오직 썩은 나무갑판, 줄지어 서있는 양식용 지주들, 이것들에 걸려있는 그물들, 내버려진 어구들만이 이곳에도 삶이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개펄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 생명이 살 수 없는 폐허의 땅으로 변해만 가고 있었다.
김재경은 변모하는 화옹지구의 풍경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국토개발의 모순을 절감했다. 쌀의 재고량은 늘어도 저서(底棲) 동물의 번식지를 희생시켜 값싼 농지는 계속 확보되어야 했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급증하는 땅에 대한 수요를 철새 도래지가 만족시켜야 했다. 따라서 작가가 엄정한 구도와 빈틈없는 사진적 수행으로 기록한 화옹지구는 인간의 사막을 위해, 자연의 개펄을 죽여 버린 살벌한 공간이었다.
개펄에서 사막으로 변해 가는 화옹지구에서 작가는 온갖 땅의 형상들을 관찰하였다. 마르고, 뒤틀리고, 갈라지고, 부어오르고, 진물이 흐르는 그 땅은 죽음을 맞이한 생명체의 부패과정을 연출하고 있었다. 작가는 그 역겨운 장면을 의학적 초연함으로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화옹지구는 사진이라는 직사각형 프레임 속에서, 엄격한 직선과 사선만으로 구획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작가의 냉정함은 어떠한 이념, 입장의 표현도 배제한다. 그의 정밀한 사진에는 녹색주의도, 사라지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없다. 죽어 가는 공간을 차갑게 인지하고, 엄격하게 기록하는 시선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의 이 객관적 초연함은 변덕스런 감정, 고집스런 이데올로기에 호소하는 주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간만을 위한 개발논리의 자가당착과 모순을 엄정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냉정하게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과 더불어, 우리의 반성은 변치 않는 결론에 도달한다.
수평선이 지평선으로 바뀐 화옹지구에는 인간을 먹여 살릴 벼들이 자랄 것이다. 규격화된 공장건물도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을 위한 사막은 머지 않아, 사라진 개펄에 대한 환영을 안겨주는 시련의 땅이 될 것이다. (최봉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