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철 《무기(無記)》

2007.06.12. 화 ~ 2007.07.10. 화

여기 전시되는 작가 양성철의 사진들은 현실의 무광으로서 바로 이러한 중성을 암시하는 개념적인 것들이다. 사진들은 공설 운동장이나 놀이 한마당에 모인 군중들, 고가다리 밑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 정자나 공터에 모여 장기를 두는 노인들, 길가에 쪼구려않은 할머니들, 도로에 나들이 나온 유치원 아이들, 공원에서 산보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더운 여름 가로수 밑에 모인 사람들, 안내자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 거리를 걷는 젊은이들, 시내 광장에서 잡담하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 어느 변사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군중들 등 공통적으로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의 모습과 거기서 누구라도 알아맞힐 수 있는 아무 사람들과 아무 장면들을 보여준다.

우선 작가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아무 장면과 아무 사람들은 첫눈에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거의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미지들은 모든 해석학적인 의미를 무효화시키면서 그 어떠한 판단도 조형적인 가치도 사회적 이슈도 완전히 비워버린 장면 그대로의 장면 혹은 기록 그대로의 기록으로만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진으로 나타난 이미지에 대해 전통과 규범이라는 틀 속에서 단번에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면서 오랫동안 소통의 대상으로서 분명한 문화적 코드로 해석하는데 길들려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사진은 우리에게 사진 읽기의 적절한 교정을 요구하는데 이럴 경우 사진 메시지의 이해는 장면들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왜 찍혀졌는가의 원인성에 있을 것이다.

작가의 아무 사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흔히 사건-순간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 패러다임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서,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장소의 산재성(散在性)과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의 반복 회귀성(回歸性) 그리고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의 지속성(持續性)의 조건들을 가진다.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더 이상 정보 전달의 소통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겹쳐진 주름 사이로 얼핏 보여주는 현실의 보이지 않는 단면들 즉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재현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것들은 어떠한 사회적 사건도, 어떠한 문화적 특이성도 허락하지 않으며 게다가 전혀 좋고 나쁨의 구분도, 진짜와 가짜의 도덕적 판단도 없는 일상의 진부하고 익숙한 장면 그대로의 중성들이다. 작가의 진정한 사진 메시지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사진들은 비록 사진의 중성적인 기록성을 활용하고 있지만 최근 거창한 논리와 웅장한 형식을 앞세운 독일 중성사진이나 요란한 장식을 달고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조형사진 그리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 모호한 논리와 역사로 무장된 오늘날 개념사진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왜냐하면 그의 중성사진들이 말하는 무언의 메시지는 웅장한 현실의 스펙터클한 장면이나 역사와 개념을 주파하는 설득력 있는 웅변과는 달리, 어딜 봐도 푼크툼(punctum) 하나 없는 도시의 회색 공간에서 작가 자신이 체험한 삶의 굴곡에서 침전된 존재의 포착 즉 판단력의 중립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 판단력의 중립은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유기로부터 무기를 암시하는 개념적인 실행으로 이해되며, 이때 사진은 이러한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재현 도구로 나타난다.

이경률 (사진 비평)

 


장소

뮤지엄한미 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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